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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

by 렌딜 2010.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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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고이 접어 담아보기.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4/6 ~ 4/9)


 

설레던 수학여행의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소파에 기대어 누웠다. 멍한 눈으로 지난 3일 동안 나의 행동과 말들을 되새겨 보았다. 돌이켜 보니 3일이란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가 버렸다. 그래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제주도의 아름다움,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들이 꿈처럼 흐릿하게 느껴졌다. 정말 꿈은 아닐까. 달력을 넘겨보지만 2010년 4월 9일. 수학여행의 마지막 날이 확실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것이 맞구나. 적당히 그리움을 접어두고 흐릿해진 기억을 붙잡기 위해 찍어둔 사진들을 하나 둘 살펴보았다.

녹동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는 약 4시간 정도의 시간동안 찍었던 사진들이 보인다. 긴 시간에 지쳐 쓰러진 사진,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애상에 젖은 사진. 나는 그 때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수학여행에 대한 부푼 기대와 설렘이 바다 저편에 떠있는 듯이 나의 모습은 바다를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제주에 도착을 하고 자연사박물관과 용두암으로 향했다. 제주도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인가. 그냥 둘러본 마을 어귀의 돌담마저도 유명한 사진작가의 작품전에 걸려있는 풍경처럼 느껴졌다. 길가에 보이는 열대나무들이 다소 단조롭게 보일 수 있는 시가의 거리를 ‘여기는 제주도랍니다.’ 하고 인식시켜 주었다. 사진을 넘기다 보니 비가 쏟아지는 모습이 보였다. 벚꽃이 만개해서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릴 기세로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꽃비를 맞으며 하얀 꽃만큼이나 밝게 웃었다. 다음 사진은 친구들이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찍은 기념사진들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담되었지만 나의 유창한 실전용 영어와 일본어 회화실력(?)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관광 오신 분들도 귀찮은 내색 없이 친절하게 사진을 찍어주셨다. 그 중 말레이시아에서 온 분과는 이메일을 나누기도 했다. 어떻게 메일을 보낼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세상을 알아갈 좋은 기회가 아닐까 생각에 기대가 된다. ‘하지메 마시테’ 라고 첫 인사를 한 것만큼은 잊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도깨비도로를 지나 숙소에 도착했다. 하나밖에 없는 침대나 공기베개를 보면서 실망감이 들었지만 저녁을 먹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할만 했다. 그러나 저녁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왠지 모르게 늙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밤에는 같은 방 친구들과 게임 올림픽을 열었다. 자칭 타짜로 불리는 승철이와 경민이의 고스톱 대결을 시작으로 체스, 팔씨름, 알까기 등 게임을 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지쳐서 모두 쓰러졌다.

다음 날 햇빛이 눈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었지만 해안의 기후는 또 다른지 마라도투어가 취소되고 대신 말쇼를 보았다. 징키스칸의 탄생에서부터 몽골을 통일시키는 일대기를 드라마 형식으로 그린 뮤지컬이었는데 눈앞에서 보는 기마술이라 놀라웠다. 말을 탄 몽골 여성분과 찍은 사진을 보니 아직도 그때의 생생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도 과거에는 기마민족으로 말을 타고 활을 쏴 백발백중을 하곤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오는데 그러한 전통을 못 살리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 다음코스는 올레길이었다. 올레는 큰 길에서부터 집 대문까지 이르는 골목을 말하는 제주도의 특징적인 구조로 좁은 돌담길이 인상적이었다. 긴 거리를 걷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버스 안에서 단절된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풍경화 속의 인물이 된 것처럼 살아 숨쉬는 자연을 느낄 수 있었다.

삼 일째 되는 날, 이틀 동안 제주도의 분위기도 익숙해진 것인지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친구들의 들떠 보이는 모습도 많이 가라앉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요함도 얼마 가지 않아 큰 풍파를 마주치게 되었다. 담임선생님께서 여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남기지 않으면 퇴학을 시키겠다는 엄명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흘러나왔으나 뭐랄까. 왠지 모를 선생님에 대한 감사함과 18살 대한민국 청소년의 풋풋함이 배여 있었다. 속으로는 좋았구나, 이 녀석들. 사진 찍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걱정을 하냐. 큰 소리 쳤지만 막상 소인국테마파크에 들어서니 눈앞이 캄캄했다. 눈을 어디에 두어도 건축물은 보이지 않고 사람만 아른 가렸다. 머리가 짧으면 우리 학교 학생이요, 길면 여학생이니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남자다. 속으로 수없이 되새긴 후 단정해 보이는 여학생에게 사진을 찍을 수 없을지 정중하게 물었다. 당황했는지 웃기만 하는 모습에 나 역시 웃음으로 대처하며 살며시 팔짱을 꼈다. 사진을 찍고 서로 민망해서 웃으며 도망치느라 아무 것도 묻지 못했지만 뭐 어떠랴. 사진 속에 그 때의 두근거림을 고이 접어두고 가끔 꺼내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다. 걸구 선생님의 미션을 수행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동안 다음 코스인 주상절리를 향했다. 말 그대로 기둥모양의 암석단면들이 절경을 이루었다. 걸구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에 의하면 뜨거운 용암과 차가운 바닷물이 만나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현상인가. 감히 인간의 손으로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빼어난 모습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물론 담임선생님께 당한 벌려 역시 경탄의 대상이었다.

마지막 날, 약간의 비가 내렸으나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날씨가 개었다. 산굼부리 분화구에서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기리고 공항으로 향했다. 내 일생의 마지막 수학여행이라서 그랬을까. 넓게 펼쳐진 들판의 작은 들꽃마저도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속 절차가 늦어져서 하마터면 제주도에 전세를 낼 뻔 했지만 다행히 비행기를 타고 반도로 큰 탈 없이 돌아왔다. 3박 4일이라는 시간. 중간에 좋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인생이란 것이 새옹지마 호사다마가 아니겠는가. 수학여행을 마친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좋지 못했던 일들은 잘 정리해서 반성하고, 좋은 추억들은 차곡차곡 고이 접어 가슴 속에 담아두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코 꿈도 아니고 허황된 시간도 아니다. 즐겁고 설레던 그 시간을 이제 잘 정리해서 담아두고 아주 가끔 쓸쓸하거나 적막할 때 살짝 꺼내어 그 때의 두근거림을 나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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