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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저장소

행군

by 렌딜 2010.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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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길

행군을 다녀와서


 


고개를 넘었나 싶었는데 또 하나의 고개가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거친 자갈밭이라 쉽지 않은 길이었는데 황토색 눈물을 질질 흘리는 진흙탕이 펼쳐진 모습을 보니까 온 몸에 기운이 빠졌다. 어느새 여기저기서 불평과 불만의 목소리가 굵어지고 이러한 행군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의문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날씨에도 굳이 행군을 했어야 했나.


아침에 든든하게 물 3병과 김밥을 챙겨서 학교를 향했다. 작년의 첫 행군 경험상 물이 부족해서 더위와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무모한 만용을 떠올리며 물만큼은 많이 가져가야한다는 생각으로 3병을 챙겼다. 친구들 역시 두툼한 가방 속에는 물병이 한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줄을 서서 출발을 기다리는데 비가 한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비는 점점 거세어졌고 운동장에는 서둘러 우비를 입는 학생과 사러가는 학생들로 인해 혼란에 휩싸였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 혹시 행군을 연기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무모한 생각이었다. 대아고의 위신과 행군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겨우 비가 조금 내리는 것으로는 수 십 년의 전통을 깰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행군이 시작되고 비가 퍼붓는 상황 속에서 우비를 입은 알록달록한 행렬이 산으로 나아갔다. 멀리서 보니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반은 행렬의 가장 뒤에 위치하고 있어서 행군의 실태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하수구와 도로에 돌아다니는 물병과 비닐, 우비들이 더 이상 앞을 나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행군을 하는가. 쓰레기를 버리려고? 이 행군의 참된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무질서한데 말이다. 이는 분교에 도착해서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학교를 나오면서 돌아본 운동장에는 빈 도시락과 물병, 비닐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저 것이 대아의 행군이란 말인가. 회의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별 탈 없이 행군은 끝이 났지만 피곤한 몸보다 먼저 이 행군에 대한 의미를 조용히 돌이켜 봐야 했다. 행군을 쉽게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처음에 걸을 땐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체험해보고 나 역시 내 자신을 돌이켜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걸었다. 하지만 힘들다는 것을 핑계로, 다리가 풀렸다는 것을 핑계로 도덕성까지 풀려버린 오늘의 행군을 나는 결코 좋게 기억할 수가 없다.

참된 길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육체적인 행군 즉 몇 km를 왔다 갔다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깊은 곳까지 자신을 성찰해 보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몸도 마음도 지친 행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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