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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책

'운영전'을 읽고

by 렌딜 2010.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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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란 무엇이기에 생사를 가늠하느뇨.

렌딜 (missrendil.tistory.com)

 

오늘날 청소년들 아니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주위의 친구들만 하더라도 며칠마다 여자친구가 바뀌는 일이 허다하다. 자기들 나름대로는 마음이 맞지 않느니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 다는 핑계를 대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단순히 그런 이유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들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예쁜 꽃에 나비가 꼬이듯, 화려한 무늬에 벌이 매료당하는 것처럼 이성으로써 호기심에 다가갔던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럼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연애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나 역시 아직은 성숙하고 있는 청소년으로써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무한정 이야기 해주고 싶다.

고전 소설 중 운영전이라는 작품이 있다. 김 진사와 궁녀인 운영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사회적인 제약으로 인해 결국 이어지지 못하고 둘 다 죽게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것은 죽음이다.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는 남자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일시적인 객기가 아니라 진정으로 여자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지 말이다. 만약 실제로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면 백이면 백 모두 정신이 나갔다고 여길 것이다. 아무리 사랑이 중요해도 목숨을 가벼이 여겼다고 비난하면서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오늘날사람들의 생각 자체에 사랑에 대한 무시가 들어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이들의 사랑에 큰 감명을 받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보다 더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용기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는 말과 같다. 어쩔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사랑한다 한 것은 아닌지, 그저 쾌락을 위해 감정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는 한번쯤 돌이켜 반성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사랑은 너무 일시적이고 쾌락 지향적이지 않은가. 단순히 고전을 시시콜콜한 옛날이야기로 느낄 것이 아니라 그 느림의 미학을 통해 참된 사랑을 느껴야 한다. 운영전을 읽다보면 아래와 같은 칠언 사운이 한 수 나온다.

누각은 깊고 깊어 저녁 문 닫혔는데
나무 그늘 구름 그림자 모두 다 희미하여라
낙화는 물에 떠서 개천으로 흘러가고
어린 제비는 흙을 물고 처마 끝을 찾아가네.
베개에 기대어 이루지 못함은 호접몽이요.
눈을 돌려 남쪽 하늘 보니 외기러기도 날지 않네.
임의 얼굴 눈앞에 있는데 어이 그리 말 없는가.
푸른 숲 꾀꼬리의 울음 들으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누나.

사랑하는 임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김 진사의 애절함이 촉촉이 느껴지는 시다. 이 시를 보다보니 전에 읽었던 신조협려의 첫머리에 쓰여진 원호문의 ‘안구사’가 떠올랐다. 원호문이 길을 가다 우연히 기러기 잡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기러기 한 쌍을 잡았는데 한 마리는 죽었고 한 마리는 그물을 피해 요행히 도망을 쳐 살았습니다. 그런데 살아남은 기러기는 도무지 멀리 도망가지 않고 그 주위를 배회하며 슬피 울다가 땅에 머리를 찧고 자살해 버렸답니다.’ 라고 했다. 원호문은 이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기러기 한 쌍을 묻어주면서 시를 한 수 지었으니 그 시가 바로 ‘안구사’이다.

세상 사람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사를 같이 하게 한단 말인가.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저 새야,
지친 날개 위로
추위와 더위를 몇 번이나 겪었던고.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 속에
헤매는 어리석은 여인이 있었네.

님께서 말이나 하련만,
아득한 만리에
구름만 첩첩이 보이고.

해가 지고
온 산에 눈 내리면
외로운 그림자 누굴 찾아 날아갈꼬.

분수의 물가를 가로 날아도
그때 피리와 북소리 적막하고
초나라엔 거친 연기 의구하네.

초혼가를 불러도 탄식을 금하지 못하겠고
산귀신도
비바람 속에 몰래 흐느끼는구나.

하늘도 질투하는지
더불어 믿지 못할 것을
꾀꼬리와 제비도 황토에 묻혔네.

천추만고에
어느 시인을 기다려 머물렀다가
취하도록 술 마시고 미친 노래 부르며
기러기 무덤이나 찾아올 것을.

진정한 사랑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어쩌면 빠르게 빠르게를 소리 높여 외치는 세상에는 단순하고 일시적이며 빠른 사랑이 더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해 타산적이고 계량화 시킬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단 한 번의 만남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운명의 상대에게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모든 마음을 쏟아 한 사람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사랑이 필요하다. 적어도 사랑할 때만큼은 바쁘게 흘러가는 21세기의 중심이 아니라 여유로움과 풍류가 넘치는 조상들의 시대로 넘어가 보자. 여유를 가지고 자연을 무대 삼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솔한 자신의 마음을 용기 내어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오늘날의 잘못된 사랑을 바로잡아 나갈 발판이 다져질 것이다.

‘운영전’을 읽고 쓴 글입니다.
운영전을 읽는 순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저도 모르게 스쳐지나가네요. 이 것도 병인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고 싶은 순간이네요.

missrendi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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