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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짧은 글

작은 별

by 렌딜 2009.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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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별


어느덧 마지막 착수에 이르렀다. 주위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고요함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슬쩍 눈을 돌려 주위의 동향을 살핀다. 역시나 고요하다. 다만 그 것이 나로 하여금 더욱 핏발 선 두 눈을 부릅뜨게 만들었다. 그 것은 바람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을 파괴시킬 듯 몰아치는 폭풍도 아니었고, 서서히 주위를 잠식해 나가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태풍도 아니었다. 소리 없이 흘러가는 잔잔한 그림자. 아, 그 나약한 실바람에 온 몸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진흙 냄새. 멀겋게 흐려진 공기의 진동 속에서 나의 눈과 코와 입이 비틀거리며 푸른 소나무 사이로 스며들었다. 길게 그리고 곧게 뻗은 소나무의 기상은 어딘가 삐뚤어진 한 마리 참새의 어설픈 날개 짓에 멈췄다. 부르르 떨렸다. 강렬히 피어오르는 태양의 아지랑이에도 부르르 떨렸다. 억수같이 퍼붓는 새까만 오물들에도 부르르 떨렸다. 떨림은 한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와 함께 방울방울 맺혀있던 인과의 결실들이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홀가분해진 것일까. 떨림은 더 아름답고 더 장대하게 울려 퍼졌다. 멀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그 옛날 칙칙했던 진흙냄새를 다시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떨림은 산을 넘고 바다를 넘어 가장 커다란 물결이 되어 마지막 얕은 고개와 마주했다. 그 고개만 넘는다면, 정말 그 고개만 넘을 수 있다면……. 거기서 끝이 났다. 굳어버린 사고, 이미 땅 속 깊이 얽혀버린 수많은 관념들의 굴레를 뒤집어 쓴 소나무는 하얗게 질렸다. 굵은 몸체와 튼실한 어깨에 흘러내린 빗방울이 무색하게 노목엔 작은 새 한 마리조차 노래하지 않았다.


소나무의 뒷모습에서 마음 속 깊은 공허함을 채우려는 몸짓이 보였다. 뭐가 우스운 걸까.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이 상황을 즐겼다. 머리 위에선 모든 눈동자들이 나의 손아래서 마지막 불꽃을 태워줄 별의 작은 몸부림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푹 숙인다. 아래에선 깊이 숨겨졌던 미지의 세계들이 일어나려 몸부림 치고 있었다. 마치 나의 발걸음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현실과 동떨어진 그 곳에서는 점점 침이 말라왔다. 입가에 침이 완전히 말라버린다면 나는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인가. 침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이 메말라 비틀어진 그들의 얼룩진 입가가 해답을 지닌 채 다가왔다. 새빨갛게 얼룩져 윤기를 찾아볼 수 없는 그 탐욕의 항아리들과 나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다. 항아리. 언제나 입을 열어 두었다. 그리고 뭐든지 삼켰다. 살인, 절도, 사기, 협박, 투기, 강간 ……. 짧은 쾌감, 절제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 게걸스럽게 삼키고 또 삼켰다. 온 몸이 붉게 물들고, 입가에 선홍빛의 끈적거리는 액체가 말라 비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벌컥벌컥 삼켜대기만 했다. 그들 앞에는 아무런 장애도 가로막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먹잇감만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지금은 내가 놓여 있다. 인육으로부터 흘러내린 기름 같은 것들이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점들을 이뤘다. 어느새 그 기름으로부터 풍기는 악취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의 온 몸을 적신다.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비명 같은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넌 맛이 없겠구나.”

“하지만 먹을 수밖에 없겠어.”


더러운 항아리를 벌려오는 그들 앞에서 나는 멍청하게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무엇을 위하여 매일 수리에게 간을 파 먹힌단 말인가. 나약한 눈물의 잔재가 말없이 내 그리고 그들의 발길을 적신다. 죽고 죽이는 세계에서 피를 마시고 살 수밖에 없었던 그들. 수 십 년 동안 반복되는 악순환 속에서 그들은 마지막 눈물, 침 그리고 인간의 맛을 잊어버렸다. 먹는다면 알 수 있겠지. 헛된 욕심과 망상에 자신을 가뒀다. 하지만 발악할수록 피로 얼룩져 메말라 버린 입 속을 다시 적셔주는 것은 피뿐이었다. 어리석은 나의 눈물에 대한 비웃음으로 시작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들은 눈물을 삼키고 침을 삼켰다. 피와 침은 뒤섞였다. 섞이고 섞여서 어떤 것이 침인지, 어느 것이 핏물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침을 삼키는 순간, 수 십 년 동안 잊었던 침을 삼키게 되는 순간. 그들의 눈가에도 방울이 맺혔다. 그들은 발악했다. 소리를 지르고 땅을 박차고 애꿎은 벽을 때리고 있었다. 그리곤 사라져 갔다. 그들은 굶주려 있지 않았다. 다만 뒷모습이 잃어버렸던 연필 한 자루를 찾은 꼬마 아이처럼 보였다.


눈을 떴다. 갖가지 조명들이 눈에 자극을 준다.


“55초 경과했습니다.”


나는 그 55초를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푸른 소나무. 진흙 냄새. 항아리. 피. 기름. 눈물. 침 ……. 그것들은 하나같이 소망을 담고 있었다. 깊은 소망들. 땀 한 방울이 흐르자 살며시 떠나갔던 그 실바람이 살며시 다가와 보듬어 주었다. 어린 소년도 여전히 포근한 그 실바람에 안기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 착수를 두지 못했다. 날 지켜보던 수많은 눈동자들은 비웃음과 물음표를 남긴 채 떠나가 버렸다. 그렇다. 나의 바둑판에는 한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펼쳐진 나의 별자리에도 한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그리고 가시덤불로 가려진 내 삶의 깊은 심연 속에도 한자리가 비워져 있다.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한자리.


나는 저 작은 별과 약속했다. 실바람이 머무는, 아름드리 소나무 한그루 피어있는, 내 나의 눈물로 적셔진 그 자리를.


 

(2008)





1년 전에 쓴 글을 약간 다듬어서 이렇게 올려 보았다.
지금 훑어보니 어색한 부분이 너무도 많다.
한창 바둑에 미쳤을 때인데, 현재는 독학의 벽을 느끼고 꿈을 접었다.
한 때는 이창호를 꿈꾸는 소년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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